諱 孝然(文靖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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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諱 孝然(文靖公) 산소 (원주)

 

문정공(文靖公)

 

공(원 효)께서는 1404년 원주(지금의 여주)에서 태어나셨다.
원주 원씨이며 고려조에서 지문하사의 벼슬을 한 (원 홍)의 6세손이시다. 


일찍이 이조(李朝)의 사마시(진사와 생원을 뽑는 시험)에 급제하고 1432년에 문과에 이름을 올렸다.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탁월한 능력을 나타냈으며, 의정부사인이 되었을 때에는 세조임금께서 정사를 보좌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시고 중요한 일은 반드시 그에게 맡겼고, 즉위한 후에 추충좌익공신의 호를 내리셨다.  


임금의 신임을 받은데 이어 나라에 공을 세우니 조정에 크게 쓰임을 받아 이조참의를 거쳐 경상 · 전라 · 평안 3도의 안렴사(지방장관)로 나갔다가 들어와 사헌부 대사헌과 형조참판이 되었고, 정헌대부예조판서 원성군(原城君)으로서 1466년 6월 13일 63세에 돌아가셨다. 
원성군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세조께서 슬퍼하시며 조정에서 하던 조회를 중지하고 조문과 장례에 쓰일 물건을 풍족히 하도록 하였고, 친히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셨다.
이 해 1466년 9월 17일에 원주 치악산 기슭 도동 서쪽 언덕에 장사하였으니, 마을과 15리쯤 떨어져 있다. 


이러한 문정공의 공로로 인해 동정의 벼슬을 한 증조할아버지(원 방) 께서는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원 헌) 께서는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우정언의 벼슬을 한 아버지(원 황) 께서는 순충보조공신, 이조판서, 대제학, 성균관대사성, 원산군(原山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원주이씨, 영중랑장 반계의 따님이시다. 

 

공의 성품은 어질었고 학식과 도량이 있으며 행실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관직을 맡고 일을 처리할 때, 주위에서 모두 공의 생각을 먼저 알아보았으니 참으로 대인의 풍모를 지녔으며,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공에게 맡길 만했다.
또 전해지기를 ‘공의 문학의 명망은 동시대의 벗들로부터 높이 받들어졌고, 태허정 · 최항 · 사가정 · 서거정 등 당대의 이름 있는 문인들과 친하였다’ 고 한다.  


평생 저술한 것을 헤아려보면 적지 않겠지만, 오래되었고 나라가 여러 번 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없어져 이제까지 집에는 남겨지지 않았고,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관청에 붙인 제영(題詠)도 척구단장(隻句短章)은 많지만 온전한 글이 전해지는 것은  극히 미미하다.  


 횡성현 사람, 주부 이완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 (원 맹)를 두었는데, 내섬시정을 지냈고, 종실 혜령군 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다.
(원 맹)의 장남 치는 우의정 한백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차남 여는 대사헌 한사문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의 기일(忌日)은 12월 5일 이지만 돌아가신 해는 알 수 없다.  


문정공의 무덤 뒤에 묘가 있는데, 부인의 무덤이라고 전하지만 증명할 수 없어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해평윤씨족보에 “서윤 윤처경의 사위 원모(元某)”라 되어있고,
원주이씨족보에도 “사부주부 이완의 사위 원모” 라도 되어있어,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공은 두 번 결혼 한 것이 확실하지만, 묘표에는 두 부인을 일컫지 않고 이씨만 적혀있다.
그런데 이씨는 사실은 원주사람인데, 봉호는 “횡성현부인”이라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다른 집안의 족보에 두 부인으로 전후를 엇갈려 일컬었고, 해평윤씨, 원주이씨 두 족보에 모두 “아들 첨추공을 낳았다” 라고 적혀있어 두 부인 중에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는 비록 상세하지 않다고 그다지 문제 될 일은 없지만, 첨추공의 어머니가 윤씨인지, 이씨인지 알지 못하니 어찌 후손의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겠는가?  


 전해지기로는 세조때에 해평윤씨 서윤공의 형인 소윤 처공이 사육신중의 한 사람인 취금(醉琴) 박팽년(朴彭年)에 연루되어, 윤씨에 장가든 사람은 세조의 명으로 이혼하고 다시 장가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이 이씨에게 장가든 것이 과연 이 때라면 첨추공이 1427년에 태어났으니 그가 윤씨의 소생임은 의심할 것 없겠으나, 문정공과 첨추공의 묘표가 모두 이씨의 소생이라고 하는 것도 지나칠 수 없으니, 이것 또한 임금의 명이 있어서 윤씨를 꺼린 까닭일 것이라 여겨진다.  


족보에 전해지지 않으니 증명하여 믿을 근거가 없고, 문정공의 묘지명의 경우 증명할 만한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지만 무덤이 오래되어 감히 열어서 살펴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때 당시에 과연 그와 같은 임금의 명이 있었다면 비록 깊숙한 데 묻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묘표에서 윤씨를 꺼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손들에게 의혹을 없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힘들어지니, 이에 감히 눈과 귀에 얻어지고 마음에 제멋대로 생각한 것으로 삼가 위와 같이 기록하고, 무덤 앞에 다시 묻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종친과 먼 후손에게 널리 찾도록 하여, 명확한 증거를 반드시 얻어 의혹을 밝히는 근거로 삼도록 하여야 겠다. 


유고(遺稿)


영천 조양각 【永川朝陽閣】
馳驅數月遍南州(치구수월편남주)  남쪽마을 여기저기 몇 개월 치달렸는데
物象佳多獨此樓(물상가다독차루)  건물의 아름다움 이 누각이 제일이라.
草色微茫平野外(초색미망평야외)  풀빛은 어렴풋이 들 밖으로 평평하고,
雲容迢遞遠山頭(운용초처원산두)  구름은 까마득히 먼 산 위에 걸렸구나.
簷前垂柳千條弱(첨전수유천조약)  처마 앞에 드리운 버들가지 가늘고,
軒下長川一帶流(헌하장천일대류)  마루 아래 긴 냇물은 한 줄기 두르며 흐른다.
吟想逍遙雖信美(음상소요수신미)  읊고 감상하며 거니는 것도 참으로 좋지마는,
那如捧日玉階遊(나여봉일옥계유)  임금님 모시고 옥계에서 노님만 할까보냐.
※ 공이 영백(嶺伯)이었을 때 순시하다 이르러 이 제영시(題詠詩)를 지었다. 옛날에는 현판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없고, 지금은 군(郡)의 병풍에 기록되어 있다.


은풍동헌에서 선부군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殷豊東軒敬次先府君韻】
地瘠胡爲號曰豊(지척호위호왈풍)  땅이 메마른데 어찌 ‘풍’이라 부르는가?
蕭條十室萬山松(소조십실만상송)  쓸쓸한 작은 마을, 온 산엔 소나무라.
看時不覺垂雙淚(간시불각수쌍루)  시절을 살피며 모르는 사이 두 줄기 눈물이 흐르니,
仍憶當年勸學功(급억당연권학공)  당시에 학문을 권장하던 공을 생각함이라.
※ 1456년(병자) 3월에 아들 추충좌익공신 통정대부관찰출척사 효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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